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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º 궁시렁/리뷰/☆ 자유글

[남과여] 가장 아름다운 청혼


[천년의 사랑] 가장 아름다운 청혼



도스토예프스키와 안나

도스토예프스키를 흔히 '세계 소설의 최고봉'이라고 한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위대한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는 40대 중반이 될 때까지 한마디로 엉망진창의 삶을 살았다. 그를 구원해 준 것은 그의 인생에 있어 네번째 여인 안나였다.

멋모르고 비밀독서회에 들어갔다가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기적적으로 감형 받은 그는 유형지 시베리아에서 형기를 채운 뒤 하사관으로 군복무를 했다. 그때 술주정뱅이와 같이 살고 있었고 자식도 있는 마리아를 만났는데, 그녀의 남편이 죽은 뒤 결혼을 하고 보니 마리아는 신경질이 심했고 곧 폐결핵에 걸려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러자 도스토예프스키는 폴리나 수슬로바라는 여인과 바람이 나 병상의 아내를 돌보지도 않고 유럽 여행을 떠났다. 그는 어디를 가나 도박을 하여 형에게 돈을 부쳐 달라고 졸라댔고, 빚을 갚으려고 소설을 쓰다 흥분하여 발작을 일으키곤 하던 간질병 환자였다. 아내는 숨을 거두었지만 그는 바로 재혼하지 않았다.

이후 폴리나에게 질질 끌려다니다 실연을 당한 뒤 안나 쿠르코프스카야라는 젊은 여인에게 청혼했다 거절 당하는 등 그의 사랑은 계속 실패였다. 게다가 후원자인 형도 죽고 몇 편 소설의 원고료는 도박으로 탕진하여 무일푼이 되었고, 곧 빚더미에 올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 출판업자에게 돈을 빌리면서 전작장편을 정해진 날까지 완성하지 못하면 위약금을 물고 9년 동안 3권의 작품집에 대한 모든 저작권을 넘겨야 한다는 내용에 서명을 한 것이었다.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속기사를 구해 구술로 4개월 동안 두 편의 소설을 쓰는 일에 착수했다. 빚을 갚기 위해 소설을 썼고, 그것이 불후의 명작이 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스무 살의 속기사 안나 스니트키나는 마흔다섯의 도스토예프스키를 헌신적으로 도와 주었다. 날이 갈수록 중년의 작가는 자기 일처럼 열심인 어린 속기사가 마음에 들었다. 소설이 마무리되는 것이 두려워질 정도로. 다행히 소설은 기한 내에 완성되었다. 1866년 11월 8일, 작가는 고맙다는 말을 전하려 속기사 안나의 집을 찾아갔다. 집에는 안나밖에 없었다. 작가는 엉뚱하게도 그녀에게 새로 쓸 소설의 줄거리를 들려주겠다고 했다. 그 얘기는 자신의 과거지사였다. 실패로 점철되어 온, 진심으로 털어놓는 인생 고백이었다.

“…그래서 그 예술가는 그런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당신 나이 또래의 젊은 여인을 만났어요. 그녀에게 안나라고 이름을 붙입시다.”

안나는 자신이 아니라 안나 쿠르코프스카야를 연상하였다. 그래서 의혹이 들기는 했으나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

“연령과 성격 차이가 그렇게 있는 젊은 처녀가 그런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는 일이 있을 수 있겠소? 바로 이것이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은 대목이요.”

“그게 왜 불가능할까요? 그녀가 정말 그를 사랑한다면 그녀 또한 행복할 거고 아무것도 후회할 게 없을 거예요!”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말을 듣고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주인공이 나라고 생각하고, 내가 당신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내 아내가 되어 달라고 구혼한다고 상상해 봐요. 그러면 당신의 답은 무엇이겠는지 말해 주겠소?”

안나는 비로소 자신이 청혼을 받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라면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생명이 다하도록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할 겁니다.”

인생의 나락에 떨어져 있는 작가의 청혼에 힘찬 목소리로 응하는 순간이었다. 문학사가 시몬스는 이렇게 적고 있다. “두 사람은 이 나라 저 나라 떠돌아다니며 살았고, 극심한 빈곤에 허덕이는 경우도 많았다. 젊은 아내는 이 모든 고난과 남편의 간질 발작, 끊임없는 노름, 그리고 첫아이의 죽음을 꿋꿋이 견뎌 냈으며 남편과 남편의 천재성에 대한 헌신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이 두번째 결혼은 진정한 사랑에 바탕을 둔 것이었고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사건이었다.”

연인에게 책을 선물하면서, 그 책 속에 나오는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에 직접 몇 자 적어 넣는 방법은 어떨까? 나 역시도 이토록 당신을 사랑하노라고.

필자 : 이승하님 시인
출처 : 월간《좋은생각》 2000년 0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