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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º 궁시렁/리뷰/☆ 자유글

[남과여] 평생을 지속한 짝사랑


[천년의 사랑] 평생을 지속한 짝사랑



찰즈 램과 앤 시몬즈

짝사랑을 해보지 않은 이는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그 사람은 나를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는데 나는 하염없이 그리워한다. 워낙 간절히 그리워해 꿈에도 나타나고, 먼발치에서 보아도 가슴이 마구 방망이질 친다. 주변에 있는 사람이어서 대화라도 하게 되는 경우, 그이는 무심코 말을 하는데 나는 말을 더듬고 얼굴이 화끈거린다.

첫사랑도 그렇지만 짝사랑도 이루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상의 차, 신분의 차, 연령의 차 등등이 원인이 되어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간절하기만 하다. 짝사랑하던 고등학교 선생님에게 사랑을 고백하여 결혼까지 한 당돌한(?) 주인공이 나오는 텔레비전 드라마가 인기를 끈 적이 있는데, 영국에도 짝사랑에 빠진 이가 있었다.

영국의 대표적인 수필가이며 비평가인 찰즈 램(1775~1834)은 정신병 유전이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매사에 자신감을 가질 수 없는 소극적인 소년이었다. 어릴 때부터 말을 꽤 심하게 더듬었고, 그 때문에 학교에 다니는 것이 창피해 열다섯 살도 되기 전에 그만두고는 동인도회사의 경리부에 서기로 취직한다. 그는 외할머니 피일드 부인이 가정부로 있는 하트포드샤이어의 어느 저택에 가서 휴가를 보내는 것이 제일 큰 낙이었다.

이 저택에서 만난 위드포드 마을의 앤 시몬즈는 평범한 시골 처녀였지만 램은 그녀를 깊이 사랑하게 된다. 첫사랑이면서 짝사랑이었다. 몇 년을 짝사랑하던 램은 일생일대의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결과는 물론 쓰디쓴 고배를 마시는 것이었다. 앤 시몬즈로서는 찰즈 램이 말을 더듬는다는 것, 열아홉 살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 학벌이 신통치 않다는 것, 몇 해 동안 계속 회사의 수습사원이라는 것 등이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만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 무렵 찰즈 램한테 아무 예고 없이 정신병이 찾아와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램이 정신병원에서 의식을 회복하고 보니 6주 동안 길길이 날뛰며 사람을 물어뜯는 등 악몽 같은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시몬즈로서는 청혼 거절이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램은 평생의 연인으로 그녀를 가슴에 담아두게 된다.

바로 그 얼마 뒤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램의 아버지는 그때 치매 상태에 있었고 어머니 또한 병석에 오래 누워 있던 중이었다. 갑자기 발작을 일으킨 램의 누이동생 메어리가 칼로 어머니를 찔러 죽이고 아버지한테 중상을 입히는 참극이 벌어진 것이다. 1796년 9월 22일의 일이었다. 메어리는 집안 내력에 정신질환이 있기에 무죄선고를 받았지만 재발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며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

램은 누이의 간호를 위해 일생을 독신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그 결과 경제적 빈곤과 정신적 불안의 상태에서 한 순간도 해방감을 맛보지 못하지만, 글을 열심히 쓰게 된다. 세계 수필문학의 명작 <엘리아 수필선>은 그렇게 해서 탄생되며, 남매가 함께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소설로 번안해서 쓴 <셰익스피어 이야기들> 또한 영문학사의 명작으로 남게 된다.

누이와 단둘이 살게 된 램은 젊은 날의 첫사랑이며 짝사랑이었던 앤 시몬즈를 잊지 못해 수필을 쓸 때는 앨리스 윈트톤이라는 이름으로, 시를 쓸 때는 앤나라는 이름으로 그녀를 거듭 되살려 내며 그리워한다. <엘리아 수필선>에서도 걸작품으로 꼽히는 ꡐ꿈속의 아이들ꡑ은 바로 젊은 날의 사랑 앨리스, 아니 앤 시몬즈를 회상하며 쓴 글이다.

램은 운명이 어긋나지 않아 앤 시몬즈와 결혼을 했더라면 혹시 태어나 있을지도 모를 두 아이의 앞에서, 돌아가신 큰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용으로 수필을 한 편 써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대한 뼈아픈 회한을 표현하였다. 그 감회가 참으로 비감하여 그 글은 영문학사에 빛나는 불멸의 작품이 되었다.

하지만 램의 첫사랑은 끝끝내 냉담하였다. 결혼한 그녀는 램이 아무리 문명을 얻어도 그의 이름을 한 번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램은 수시로 발작을 일으키는 누이를 극진히 돌보며, 술과 담배를 벗삼아 글을 쓰며 살다가 나이 예순에 죽었다. 아마 죽는 그날까지도 앤 시몬즈를 그리워했으리라.

시인 이승하 님은 중앙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으며,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 등의 시집을 냈습니다.


필자 : 이승하님 시인  

출처 : 월간《좋은생각》 2000년 04월호